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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historical materials related to the Liaoli relationship in the Liao Dynasty tomb epitaphs: 「Xiao Jin's Tomb Epitaph」,「Zhao Kuangyu's Tomb Epitaph」,「Xiao Yi's Tomb Epitaph」 and 「Gao Shin's Tomb Epitaph」

Kun Z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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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蕭僅墓誌」, 「趙匡禹墓誌」, 「蕭義墓誌」 및 「高士寧墓誌」는 요려관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는 주목받지 못한 자료이다.「蕭僅墓誌」에서는 소근이 1010년 요려 제2차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타 문헌과 결합하면, 소근과 요려 3차 전쟁에 참가했던 蕭排押과는 숙질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소근 가족은 요려전쟁에 매우 밀접하게 관여하였다. 소근은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여 주로 東京道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곳은 요나라가 고려를 제어하는 군사요충지로서 무장들은 종종 훈척 인원이 담당하였다.「趙匡禹墓誌」 중 "東韓作梗, 不遵王命."이라는 서술은 너무 모호하여 60세인 조광우가 참여한 것이 2차 요려전쟁의 증거로는 부족하다. 조광우의 나이와 요나라가 고려와 송나라 간 교류에 대한 경계심을 고려할 때, 그가 43세였던 993년 요려 1차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묘지명 자체의 서술에만 근거하여 실제 상황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조광우가 참여한 것이 바로 2차 요려전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독단적이다.「蕭義墓誌」에서는 소의의 증조부인 蕭恭에게 요려전쟁에 참여했으나 어느 차수의 요려전쟁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는 현재 유일하게 요려전쟁을 언급한 奉敕撰墓誌이다. 소공은 요려전쟁에 참여한 후 가족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이 묘지는 전쟁 종료 약 100년 후에 작성되었다. 전쟁 종료 약 50년 후에 작성한 「趙匡禹墓誌」와 비교하면 두 묘지에서의 전쟁 서술 방식은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후대 사람들이 묘지의 서술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전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선조가 요려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묘지에 기록될 만한 공훈임을 설명한다.「高士寧墓誌」에서는 고사녕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역사 사실이 고려 사료에는 기재돼 있지만 약간 차이가 있으며, 묘지는 사료와 상호 보완된다. 고사녕 가문은 송나라 강남 출신으로 품행이 강직하였고, 두 차례 과거에서 인재를 선발함으로 참여하였다. 고사녕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기 전 주로 中京道에서 활동했는데, 이곳은 요나라 주변의 사절들을 접대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외교 업무에 익숙하여 漢人 사신으로서 副使 신분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당시 요나라가 고려에 파견한 사절의 용인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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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僅墓誌」, 「趙匡禹墓誌」, 「蕭義墓誌」 및 「高士寧墓誌」는 요려관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는 주목받지 못한 자료이다.「蕭僅墓誌」에서는 소근이 1010년 요려 제2차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타 문헌과 결합하면, 소근과 요려 3차 전쟁에 참가했던 蕭排押과는 숙질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소근 가족은 요려전쟁에 매우 밀접하게 관여하였다. 소근은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여 주로 東京道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곳은 요나라가 고려를 제어하는 군사요충지로서 무장들은 종종 훈척 인원이 담당하였다.「趙匡禹墓誌」 중 "東韓作梗, 不遵王命."이라는 서술은 너무 모호하여 60세인 조광우가 참여한 것이 2차 요려전쟁의 증거로는 부족하다. 조광우의 나이와 요나라가 고려와 송나라 간 교류에 대한 경계심을 고려할 때, 그가 43세였던 993년 요려 1차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묘지명 자체의 서술에만 근거하여 실제 상황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조광우가 참여한 것이 바로 2차 요려전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독단적이다.「蕭義墓誌」에서는 소의의 증조부인 蕭恭에게 요려전쟁에 참여했으나 어느 차수의 요려전쟁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는 현재 유일하게 요려전쟁을 언급한 奉敕撰墓誌이다. 소공은 요려전쟁에 참여한 후 가족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이 묘지는 전쟁 종료 약 100년 후에 작성되었다. 전쟁 종료 약 50년 후에 작성한 「趙匡禹墓誌」와 비교하면 두 묘지에서의 전쟁 서술 방식은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후대 사람들이 묘지의 서술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전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선조가 요려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묘지에 기록될 만한 공훈임을 설명한다.「高士寧墓誌」에서는 고사녕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역사 사실이 고려 사료에는 기재돼 있지만 약간 차이가 있으며, 묘지는 사료와 상호 보완된다. 고사녕 가문은 송나라 강남 출신으로 품행이 강직하였고, 두 차례 과거에서 인재를 선발함으로 참여하였다. 고사녕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기 전 주로 中京道에서 활동했는데, 이곳은 요나라 주변의 사절들을 접대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외교 업무에 익숙하여 漢人 사신으로서 副使 신분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당시 요나라가 고려에 파견한 사절의 용인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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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con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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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hod / appr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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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fin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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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i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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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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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ilable abstract

「蕭僅墓誌」, 「趙匡禹墓誌」, 「蕭義墓誌」 및 「高士寧墓誌」는 요려관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는 주목받지 못한 자료이다.「蕭僅墓誌」에서는 소근이 1010년 요려 제2차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타 문헌과 결합하면, 소근과 요려 3차 전쟁에 참가했던 蕭排押과는 숙질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소근 가족은 요려전쟁에 매우 밀접하게 관여하였다. 소근은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여 주로 東京道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곳은 요나라가 고려를 제어하는 군사요충지로서 무장들은 종종 훈척 인원이 담당하였다.「趙匡禹墓誌」 중 "東韓作梗, 不遵王命."이라는 서술은 너무 모호하여 60세인 조광우가 참여한 것이 2차 요려전쟁의 증거로는 부족하다. 조광우의 나이와 요나라가 고려와 송나라 간 교류에 대한 경계심을 고려할 때, 그가 43세였던 993년 요려 1차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묘지명 자체의 서술에만 근거하여 실제 상황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조광우가 참여한 것이 바로 2차 요려전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독단적이다.「蕭義墓誌」에서는 소의의 증조부인 蕭恭에게 요려전쟁에 참여했으나 어느 차수의 요려전쟁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는 현재 유일하게 요려전쟁을 언급한 奉敕撰墓誌이다. 소공은 요려전쟁에 참여한 후 가족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이 묘지는 전쟁 종료 약 100년 후에 작성되었다. 전쟁 종료 약 50년 후에 작성한 「趙匡禹墓誌」와 비교하면 두 묘지에서의 전쟁 서술 방식은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후대 사람들이 묘지의 서술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전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선조가 요려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묘지에 기록될 만한 공훈임을 설명한다.「高士寧墓誌」에서는 고사녕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역사 사실이 고려 사료에는 기재돼 있지만 약간 차이가 있으며, 묘지는 사료와 상호 보완된다. 고사녕 가문은 송나라 강남 출신으로 품행이 강직하였고, 두 차례 과거에서 인재를 선발함으로 참여하였다. 고사녕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기 전 주로 中京道에서 활동했는데, 이곳은 요나라 주변의 사절들을 접대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외교 업무에 익숙하여 漢人 사신으로서 副使 신분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당시 요나라가 고려에 파견한 사절의 용인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Key concepts: Epitaph, Ancient history,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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